초등학교 교과서였던가요,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읽고 감동을 받은 기억이 새롭습니다. 볏단을 나눈 형제 이야기였습니다. 옛날 어떤 마을에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좋고 부모에게는 효성이 지극한 형제가 살고 있었지요. 한 해 농사를 잘 짓고 곡식을 거둬들일 때의 일이었습니다.
추수를 마친 형이 동생 생각을 했습니다. 아우가 막 새살림을 시작했으니 가재도구며 집안에 장만할 필요한 것이 많으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냥 주면 안 받을 것이 자명하다 생각한 형은 밤중에 몰래 일어나 자기 논에 쌓여 있는 볏가리를 지게에 지고 동생의 논으로 가 동생의 볏가리에 얹어 두었습니다. 흐뭇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겠지요.
아우의 생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추수를 마친 뒤 형을 생각한 것입니다. 형이 부모님을 모시고 사니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려야겠다고 생각한 동생은 밤중에 자다 말고 일어나 자기 논에 쌓아둔 볏가리를 형의 논으로 옮겼습니다.
다음날 논으로 나간 두 형제는 모두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분명히 볏가리를 옮겼는데도 벼가 축나지 않고 그냥 그대로였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지요. 그날 밤 두 형제는 볏가리를 다시 옮겼는데, 다음날 보니 역시 줄어든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밤마다 볏가리를 나르던 형제가 어느 날 밤 다리 위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볏가리를 지고 있는 모습을 서로 마주하는 순간, 왜 볏가리가 줄어들지 않았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지요. 형제는 지게를 내려놓고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지요.
볏단을 나른 형제 이야기가 새롭게 떠오르는 것은 재산 문제로 형제끼리 서로 다투는 것은 물론 살인을 일으키기까지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게 되는 세태도 있지만, 그보다 마음이 가는 것은 쌀과 관련된 남북한의 상황 때문입니다. 남는 쌀을 보관하는 비용이 과다하게 발생하여 쌀을 사료로 만들겠다고 발표를 하는 것을 얼마 전 보았습니다. 소식을 접하는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던 것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하는 자괴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쌀이 갖는 의미는 남다릅니다. 쌀은 단순한 식량 중의 하나가 아니라 삶의 근거요, 이웃간 인정의 근본이기도 합니다. 쌀이 떨어졌다 함은 더 이상은 살아갈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뜻이요, 쌀을 건넨다 함은 마음으로 아픔을 나눈다고 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따뜻한 마음의 표지였습니다.
북한의 형제들이 굶어 죽어가는 판국에, 철조망에 막혔을 뿐 여전히 등을 맞대고 살아가는 남쪽에서는 남아도는 쌀을 주체하지 못해 동물 사료로 만들겠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을까요. 형제가 나란히 앉아 한쪽은 배곯아 죽고, 한쪽은 배불러 죽는다면 하늘 아래 이처럼 큰 죄가 어디 있을까요.
물론 얼마든지 댈 수 있는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고 망설이고 미루는 동안 우리의 형제가 굶주린다면, 주린 배를 안고 죽어간다면 그건 씻을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짓는 것과 다름이 없는 일일 것입니다.
행여 서로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한낮의 밝음을 피해 밤중에 지게를 지고 서로의 논을 찾았던 형제간의 우애와 조심스러움만 있다면 형제애를 나눌 길은 얼마든지 있을 것입니다..